
여행을 하며, 사실은 메리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도착했습니다. 유카탄 반도의 거점 도시라는 것 정도만 알았을 뿐, 어떤 도시인지 느낌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을 들여놓고 나서, 이 도시는 서두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몸으로 먼저 깨달았습니다. 짧은 체류 시간이 오히려 아쉬울 만큼 도시의 밀도가 낮지 않았습니다.
Paseo de Montejo: 화려함과 민낯 사이
파세오 데 몬떼호(Paseo de Montejo)는 메리다를 처음 걷는 여행자에게 거의 반드시 추천되는 대로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카탄 지역에서 에네켄(henequen)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귀족 계층이 이 거리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에네켄이란 용설란과 식물에서 추출한 섬유로, 한때 '녹색 금(green gold)'이라 불릴 만큼 유카탄 경제를 떠받쳤던 핵심 수출 자원입니다. 그 자본이 이 거리의 건축물들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건물 양식은 오스만(Haussmann)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풍 신고전주의 건축(Neoclassical Architecture)이 주를 이룹니다. 신고전주의 건축이란, 고대 그리스·로마의 건축 비례와 장식을 근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양식을 말합니다. 파리의 대로변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파사드(facade), 즉 건물 정면부의 조형적 구성이 이 거리의 특징입니다. 그렇다고 파리처럼 압도적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다릅니다. 규모는 훨씬 아담하고, 오히려 그 점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그란 무세오 델 문도 마야(Gran Museo del Mundo Maya de Mérida)와 인류학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인류학박물관을 방문하려다 하필 휴관일에 걸려 문 앞에서 발을 돌렸는데, 그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박물관이라고 하면 Gran Museo del Mundo Maya가 더 유명하다고 하는데, 제가 직접 가보지 못한 만큼 말을 아끼겠습니다. 다만, 파세오 데 몬떼호 자체는 박물관 없이 그냥 걷기만 해도 충분히 시간이 잘 흘러갔습니다. 카페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는 시간이 어떤 관람보다 기억에 남았습니다.
메리다 대성당: 밖에서 봐서는 절대 모르는 것
메리다 대성당(Catedral de Mérida)은 1598년에 완공된 건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성당 중 하나입니다. 정확히는,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 식민지화 과정에서 스페인이 건설한 대형 성당 가운데 완공 연도가 가장 앞선 축에 속합니다. 여기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종교 건축은 '에반젤리제이션 아키텍처(Evangelization Architecture)'라는 개념으로도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라, 원주민 개종을 목적으로 권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건축물이라는 뜻입니다.
낮에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성당이라고?" 외관이 굉장히 단순합니다. 화려한 조각이나 섬세한 장식 없이 직선과 탑으로만 구성된 정면 파사드(facade)는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엄격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조명이 올라오는 시간대에 다시 광장으로 나갔을 때, 같은 건물이 맞나 싶을 만큼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거친 석재 표면이 빛을 흡수하면서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드는 장면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내부는 더욱 단순합니다. 화려함을 기대하고 들어가면 당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관광객도 있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 소란스럽지 않았습니다. 도시 한가운데 이런 정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메리다를 설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메리다 대성당에 대한 더 자세한 역사 정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UNESCO Tentative List)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슈말: 치첸이트사와 비교하면 생기는 오해
우슈말(Uxmal)을 검색하면 종종 "치첸이트사보다 못한 유적지"라는 식의 글이 보입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규모가 작다는 것과 덜 인상적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슈말은 메리다 시내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마야 건축 양식 중에서도 '푹 양식(Puuc style)'을 대표하는 유적지입니다. 푹 양식이란 하단부는 단순하고 평탄하게, 상단부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하학 문양과 가면 조각으로 채우는 마야 지역 고유의 건축 기법을 말합니다.
제가 직접 걸으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건 바로 벽면의 조각들이었습니다. 치첸이트사는 피라미드 자체의 규모와 구조가 압도적이라면, 우슈말은 벽 하나하나에 새겨진 문양의 밀도가 압도적입니다. 마야 문명에서 비의 신으로 여겨지는 차크(Chaac)를 형상화한 마스크들이 반복되며 쌓인 벽은, 멀리서 보면 패턴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각각의 조각이 모두 다릅니다. 이건 실제로 가서 코앞에서 봐야만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슈말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도 두 가지 시각이 공존합니다. '세 번'을 의미하는 옥스말(Oxmal)에서 왔다는 가설과, '미래'를 뜻하는 우치말(uchmal)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정설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결론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슈말을 방문하기 전에 알아두면 유용한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치첸이트사보다 방문객이 적어 유적 앞에 여유롭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인파에 치여 사진 한 장 건지는 것과는 경험이 다릅니다.
- 현재 대피라미드(Pyramid of the Magician) 북쪽을 제외한 약 90%가 아직 복원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체의 일부라는 점을 알고 보면 감상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 직사광선이 매우 강합니다. 오전 이른 시간 방문을 강하게 권장합니다. 제 경험상 오후 2시 이후는 체력 소모가 배가 됩니다.
- 마야 유적의 배경 지식을 간단히 갖추고 가면 훨씬 많은 것이 보입니다. 푹 양식과 차크 신화 정도만 알아도 벽면이 다르게 읽힙니다.
우슈말의 고고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UNESCO 세계유산 공식 페이지(Uxmal Pre-Hispanic Town)에서도 상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96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유적은 마야 저지대 문명의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메리다는 서두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도시입니다. 명소를 체크리스트처럼 소비하는 여행보다, 광장에 앉아 저녁 공기를 맡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파세오 데 몬떼호를 걷고, 대성당 앞에서 조명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여유가 된다면 우슈말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흐름을 권합니다. 관광지를 많이 보는 것보다, 이 도시의 속도에 몸을 맞추는 것이 메리다를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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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s-g150811-Activities-Merida_Yucatan_Peninsula.html https://whc.unesco.org/en/list/791/ https://whc.unesco.org/en/tentativelists/5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