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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바라코아 여행 (엘 융케, 플라야 마과나, 말레콘)

by nimonga 2026. 5. 19.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일지에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다"고 기록한 곳이 바라코아입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평가는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처음 이 마을에 발을 들였을 때, 화려한 랜드마크 하나 없는데 어디서 이 묘한 끌림이 오는 건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엘 융케와 플라야 마과나 — 숫자로 읽는 바라코아의 자연

바라코아는 쿠바 동쪽 끝, 관타나모 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육로로 이동할 경우 라 파롤라(La Farola) 산악도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해발 약 600m 고지를 굽이굽이 넘는 이 도로의 길이는 편도 약 50km입니다. 제가 직접 콜렉티보(합승택시)에 몸을 구겨 넣고 다섯 시간을 달렸는데, 정상을 넘는 순간 안개 속에서 열대우림이 갑자기 펼쳐졌습니다. 운전사 아저씨가 룸미러 너머로 씩 웃으며 "이제 다른 쿠바야"라고 했던 그 말이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바라코아에서 가장 먼저 오른 곳은 엘 융케(El Yunque)입니다. 엘 융케란 스페인어로 '모루(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릴 때 받치는 쇳덩이)'를 뜻하며, 산 정상부가 칼로 자른 듯 평평한 지형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해발 575m의 이 산은 타이노(Taíno) 원주민이 신성시했던 곳으로, 타이노란 콜럼버스 도착 이전 카리브 제도에 살던 원주민 집단을 가리킵니다. 왕복 약 4시간의 트레킹 코스 내내 생물다양성(Biodiversity) — 생태계 내에 존재하는 생물 종류의 다양한 정도 — 이 압도적으로 펼쳐졌고, 쿠바 고유종 새소리가 숲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직접 올라보니 가이드 이달고의 말대로 마지막 3분의 1 구간은 전날 비 덕분에 상당히 미끄러웠습니다. 나무뿌리를 손으로 잡아가며 기어오른 끝에 닿은 정상에서는 두아바강과 토아강이 은빛으로 굽이치는 풍경과 수평선 너머 카리브해가 360도로 펼쳐졌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유명 관광지의 전망대에서 느끼는 것과는 질감 자체가 달랐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폭포 아래 웅덩이에 옷 입은 채로 뛰어들었고, 이달고가 건넨 럼을 한 모금 받아 마셨는데 그 푸른 물빛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옵니다.

엘 융케 트레킹 시 체크해야 할 핵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가이드 동반 필수: 국립공원 내 지정 가이드 없이는 입산이 불가합니다.
  • 우기(6~10월) 주의: 직전 날 강우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고 등산화를 착용하십시오.
  • 출발 시각: 이른 오전 출발을 권장합니다. 오후엔 스콜이 잦습니다.
  • 하산 후 폭포: 코스 내 폭포 웅덩이에서의 수영이 허용되며, 장비 없이도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음 날 향한 플라야 마과나(Playa Maguana)는 시내 북서쪽으로 약 20km 거리의 해변입니다. 비씨택시(Bicitaxi) — 자전거 앞뒤에 좌석을 붙인 쿠바식 인력거 — 를 타고 비포장 구간을 한 시간 가까이 달려야 하는데, 그 길 자체가 이미 여행이었습니다. 유네스코(UNESCO)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 해안 일대는 산호초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으며, 산호초란 석회질 골격을 가진 산호 군집이 쌓여 형성된 해저 구조물로 수많은 해양 생물의 서식지 역할을 합니다. 바라데로나 칸쿤과 달리 대형 리조트가 없어 해변 전체가 거의 사유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출처: UNESCO 생물권보전지역 공식 사이트).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흔히 카리브 해변이라면 정비된 비치베드와 칵테일 서비스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는데, 마과나에서는 빅토르 아저씨의 팔라다르(Paladares) — 쿠바의 소규모 가정식당을 뜻하는 말 — 에서 그날 아침 잡은 도미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미화 8달러에 먹었습니다. 핸드폰 신호가 없었고, 시계는 무의미했습니다. 노을까지 보고 가라는 빅토르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던 그 오후가, 제가 쿠바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비생산적이고 가장 충만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말레콘의 저녁 — 수치보다 감각으로 기억되는 도시

바라코아 말레콘(Malecón)은 하바나의 그것과 비교하면 훨씬 짧고 소박합니다. 말레콘이란 해안을 따라 조성된 방파제 겸 산책로를 뜻하며, 쿠바 주요 도시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도시 인프라입니다. 하바나 말레콘이 약 8km에 달하는 반면, 바라코아의 것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라코아에 머무는 동안 가장 좋아한 시간이 사실 엘 융케를 오른 날도, 마과나에서 놀던 날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저녁 여섯 시 반쯤 카사 파르티쿨라르(Casa Particular) — 쿠바의 민박 형태 숙박 시설로, 현지 가정집에서 방을 빌려 묵는 방식 — 에서 나와 말레콘을 30분 걷는 시간이 가장 좋았습니다.

쿠바 관광부(Ministerio de Turismo de Cuba)에 따르면 바라코아는 쿠바에서 스페인 정착민이 최초로 건설한 도시로, 1511년 도시 설립 기록이 공식적으로 존재합니다(출처: 쿠바 관광부 공식 사이트). 500년이 넘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 곳인데, 말레콘의 낡은 콘크리트 방파제와 그 너머 바라코아만(灣)의 조합이 그 시간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면 하늘이 분홍에서 주황으로, 다시 거의 보랏빛에 가까운 푸른색으로 단계적으로 변했고, 등 뒤로는 엘 융케의 평평한 실루엣이 검게 도드라졌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매일 같은 자리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페드로 할아버지가 먼저 손짓했습니다. 스페인어가 짧아 거의 말을 나누지 못했지만, 그는 손주 사진을 꺼내 보여줬고 저는 한국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20분쯤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언어 없이도 충분히 연결될 수 있는 장면이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바라코아를 떠나는 날 아침, 해가 완전히 뜨기 전 말레콘을 한 번 더 걸었습니다. 밤새 내린 비 탓에 공기는 짙고 축축했고, 거친 파도 소리가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낯설기만 했던 이 골목이 어느새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나흘 동안 산 것이라고는 광장 노점의 작은 카카오 상자 하나, 시장의 손바느질 손수건 하나, 그리고 페드로 할아버지가 마지막 날 슬쩍 쥐여준 매끄러운 산호 조각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벼운 가방이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바라코아는 숫자로 정리되는 여행지가 아닙니다. 편리한 교통도, 세련된 리조트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이 도시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정글의 축축한 공기, 비 내린 산길의 흙냄새, 빅토르의 구운 도미, 페드로 할아버지와의 침묵. 한 번 가면 두 번을 고민하게 되는 도시입니다. 다음에 쿠바를 간다면, 하바나보다 바라코아를 먼저 검색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 UNESCO 생물권보전지역 공식 사이트: https://www.unesco.org/en/mab/biosphere-reser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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