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남부, 험준한 산악 지형 한가운데 자리한 와하까는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 달랐습니다. '오악사카'라고 쓰여 있지만 현지인들은 '와하까'라고 발음하는 이곳. 제가 처음 발음을 교정받았을 때 괜히 더 이 도시에 애착이 생겼습니다. 화려한 리조트도, 세련된 관광 인프라도 아닌, 수천 년 역사가 골목 골목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곳이었습니다.
와하까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혹시 '와하까'라는 지명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 궁금하신 적 있으신가요? 저도 현지에서 가이드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쳤던 이야기였는데, 막상 알고 나니 도시 전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 지역에는 코팔(Copal)나무가 많습니다. 코팔나무란 나무 끝에 하얀 솜뭉치 같은 열매가 달리는 수종으로, 고대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문명에서 종교 의식에 쓰이는 향 재료로도 사용된 나무입니다. 메소아메리카란 지금의 멕시코 중남부부터 중앙아메리카 북서부에 걸친 고대 문명권을 일컫는 말입니다. 현지인들이 이 나무를 '와헤'라고 불렀고, 그 발음이 변형되어 '와하까'라는 지명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몬테 알반(Monte Albán)이라는 이름은 '하얀 산'이라는 뜻으로, 바로 이 코팔나무가 산 전체에 가득했던 풍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름 하나에 자연과 문화와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게, 와하까를 더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몬테 알반, 정상에서 마주한 4만 명의 흔적
솔직히 처음엔 기대가 크지 않았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유적지는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고 정작 감동은 덜한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몬테 알반은 달랐습니다.
와하까 시내에서 차로 30분, 산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인공 대지(臺地), 즉 산 정상을 평탄하게 깎아 만든 거대한 플랫폼 위에 광장을 중심으로 13개의 계단식 피라미드 신전과 천문 관측소를 포함한 26채의 건물 터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와하까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그 풍경 안에 서면, 이 공간이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도시였다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몬테 알반은 기원전 800년경 올멕(Olmec) 문화를 배경으로 성장한 유적입니다. 올멕 문화란 멕시코 만 연안에서 발생한 메소아메리카 최초의 주요 문명으로, 이후 마야, 아스텍 등 여러 문명에 영향을 준 기반 문화를 뜻합니다. 이후 기원전 300년경부터는 사포텍(Zapotec) 문화권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전성기를 맞이했고, 기원후 200년 이후에는 이곳에만 4만 명이 거주하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계획도시로 기능했습니다.
이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되어서가 아닙니다. 도시 계획, 천문학적 배치, 석조 건축 기술 등 당시 문명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考古學)적 가치 때문입니다. 고고학이란 과거 인류가 남긴 유물과 유적을 발굴·분석하여 역사를 복원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유네스코(UNESCO) 등재 기준과 현황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페이지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드넓은 잔디밭과 침묵이었습니다. 다른 유명 유적지처럼 너무 붐비지 않아서,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공간의 무게가 더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산토 도밍고 성당, 금박 바로크의 압도감
와하까 시내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칼로(Zócalo), 즉 도시 중앙 광장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산토 도밍고 성당(Templo de Santo Domingo de Guzmán)은 어떤 사진으로도 내부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1572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200년에 걸쳐 완성된 이 건물은 바로크(Baroque) 양식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바로크 양식이란 17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건축 및 예술 양식으로, 화려한 장식과 역동적인 구성,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특징으로 합니다. 성당 내부의 모든 벽면과 천장이 금박 장식으로 덮여 있어,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을 듯한 압도감을 줍니다. 제 경험상 유럽의 많은 성당을 봤음에도 이곳의 금빛 밀도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성당 왼편에는 수도원을 개조한 와하까 문화박물관이 있습니다. 고대 유물 컬렉션의 규모가 상당해서 성당만 보고 나오는 건 절반만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박물관 내부에서는 수도원 시절부터 가꿔온 식물원도 내려다볼 수 있는데, 박물관 투어를 신청해야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와하까에 인상적인 교회가 많다는 건 사실이지만, 산토 도밍고는 그중에서도 단연 다른 무게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현지인들의 종교 행사로 가득 차는 이곳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의 공간이라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툴레 나무, 2천 년의 나이테를 가진 또 다른 여행자
와하까를 떠나 미틀라(Mitla) 유적지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툴레(Tule)라는 작은 마을 국도변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와 마주합니다. 세계에서 둘레가 가장 큰 나무, 아르볼 델 툴레(Árbol del Tule)입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솔직히 '그냥 큰 나무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수령 약 2,0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편백나무(Montezuma Cypress, 학명 Taxodium mucronatum)의 둘레는 58m, 높이 42m, 직경 14m에 달합니다. 편백나무란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침엽수로, 멕시코 원산의 이 수종은 몬테수마 사이프러스라고도 불립니다. 성인 30명이 손을 잡고 둘러싸야 할 만큼의 둘레라는 건 수치로는 가늠이 안 됩니다. 직접 서서 올려다보아야 알 수 있는 크기입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성당 건물이 미니어처처럼 보였습니다. 투박하고 깊게 파인 나무껍질의 주름, 딱딱한 바닥을 뚫고 굳게 내린 뿌리를 보고 있자니, 이 나무가 로마 제국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부터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습니다. 저는 잠깐 이 나무도 긴 세월을 버텨온 또 다른 여행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와하까 여행에서 꼭 챙겨야 할 핵심 스폿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몬테 알반 유적지: 사포텍 문명의 계획도시. 와하까 시내에서 차로 30분. 오전 일찍 방문 권장
- 산토 도밍고 성당 및 와하까 문화박물관: 금박 바로크 인테리어와 고대 유물 컬렉션. 박물관 투어 신청 필수
- 아르볼 델 툴레: 미틀라 방면 국도변 툴레 마을. 당일치기 이동 중 경유 가능
- 미틀라 유적지: 정교한 석조 기하학 문양으로 유명한 믹스텍-사포텍 유적. 툴레와 동선 연결 가능
- 이에르베 엘 아구아(Hierve el Agua): 굳어버린 폭포처럼 보이는 석회암 지형과 온천. 오악사카 자연의 진면목
와하까 지역의 문화유산과 자연 명소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멕시코 관광청 공식 사이트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와하까는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여행지가 아닙니다. 천천히 걸을수록, 오래 머물수록 더 깊은 층위가 드러나는 도시였습니다. 몬테 알반의 침묵, 산토 도밍고의 금빛, 툴레 나무의 나이테, 이 세 가지만으로도 멕시코 여행의 기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처음 일정을 짤 때 2박으로 계획하셨다면, 하루를 더 추가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길 권합니다.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낮은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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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expedia.co.kr/Oaxaca.dx11175
https://whc.unesco.org/en/list/415
https://www.visitmexico.com/oaxa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