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여행에서 가장 때 묻지 않은 지역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치아파스를 이야기합니다. 화려한 리조트도, 넘치는 관광 인프라도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남는 곳이었습니다. 원주민의 저항 정신이 도시 이름에 새겨진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부터, 정글 속 마야 문명의 흔적 팔렌케, 그리고 에메랄드빛 물이 쏟아지는 아구아 아술까지. 치아파스는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 도시 이름 하나에 역사가 담긴 곳
멕시코에서 가장 색채가 뚜렷한 도시를 떠올리면 과나후아또를 먼저 꼽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치아파스의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를 처음 걸었을 때 비슷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색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 사이로 해발 2,120m 특유의 얇고 서늘한 공기가 흘렀고, 고개를 들면 울창한 산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냥 예쁜 고산 마을이라고 생각했다가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도시 이름 자체가 심상치 않습니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라는 인물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그는 15~16세기 스페인 수도사이자 역사가로, 스페인의 식민지 수탈 현장을 직접 기록하고 원주민의 권리를 평생 외쳤던 사람입니다. 도시가 그의 이름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님을 처음부터 암시합니다.
사빠띠스따(Zapatista) 운동 역시 이 도시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빠띠스따란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에 맞서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봉기한 민족해방군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수백 년간 이어진 토지 수탈과 빈곤에 맞선 무장 저항 운동이었습니다. 그 정신은 지금도 골목 벽화와 상점 이름 곳곳에 살아 있었고, 저는 그것이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메시지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달루페 성당(Guadalupe)도 꼭 올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야 만나는 성당 안에는 성모상 테두리에 네온사인이 둘러져 있고, 성모의 피부색이 멕시코 토착민의 그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토착화 신학(Inculturation Theology)이란 외래 종교가 현지 문화와 융합해 새로운 신앙 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이 성당이 그 살아있는 예였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한참 바라보니 오히려 더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팔렌케, 정글이 삼켰다 돌려준 마야의 기억
팔렌케 유적지는 그냥 크고 오래된 돌무더기가 아닙니다. 7세기에 최전성기를 맞이했던 이곳은 치첸이트사나 테오티후아칸보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마야 문명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유적지 중 하나로 꼽힙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정글이 유적 바로 곁까지 밀고 들어와 있어서, 돌과 나무가 뒤섞인 풍경이 마치 유적이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팔렌케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비문 피라미드(Temple of the Inscriptions)입니다. 비문 피라미드란 내부에서 620여 개의 상형문자 비문이 발견된 계단식 피라미드로, 마야 신화와 지배자 계보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집트 상형문자와 구조가 비슷한 마야 문자 덕분에 고고학자들이 팔렌케 왕조, 즉 바흘람(Bahlam) 왕가와 파칼(Pakal) 왕의 업적을 상당 부분 해독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돌 위에 새겨진 글자 하나가 천 년의 역사를 복원하는 열쇠가 된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8번 신전, 흔히 붉은 여왕의 신전(Temple of the Red Queen)이라 불리는 곳도 놓치면 아쉽습니다. 붉은 여왕의 신전이란 바흘람 2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골이 적색 황화수은(Cinnabar)으로 뒤덮인 채 발견된 무덤 신전을 가리킵니다. 황화수은은 당시 마야 귀족 장례에서 사후 세계와의 연결을 상징하는 물질로 사용되었습니다. 발굴 당시 사진을 보면 관 전체가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어 숨이 멎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팔렌케 유적지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페이지(출처: UNESCO World Heritage)에서 등재 배경과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시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적지를 걷기 전에 미리 읽어두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치아파스를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팔렌케 유적에서 꼭 확인하면 좋은 포인트를 정리해봤습니다.
- 비문 피라미드: 620여 개의 마야 상형문자 비문이 새겨진 곳으로, 왕조 계보 해독의 핵심 유적
- 붉은 여왕의 신전(8번 신전): 적색 황화수은으로 덮인 여성 유골이 발굴된 왕실 무덤
- 팔렌케 박물관: 유적지 입구 근처에 있으며, 출토 유물과 마야 문자 해독 과정을 전시
- 정글 트레일: 유적 외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로, 원숭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는 경험이 특별
아구아 아술과 미솔하, 같은 치아파스지만 전혀 다른 물의 얼굴
폭포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분들, 치아파스에 오시면 그 생각이 바뀔 겁니다. 산 크리스토발에서 팔렌케로 이동하는 길목에 아구아 아술(Agua Azul)이 있고, 팔렌케 도시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미솔하(Misol-Ha) 폭포가 나옵니다. 두 곳은 직선거리로도 그리 멀지 않은데, 막상 가보면 같은 자연이 이렇게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나 싶어서 놀랍습니다.
아구아 아술은 스페인어로 '푸른 물'이라는 뜻입니다.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이 석회암 지층과 반응하고 그 위로 햇빛이 닿으면 물이 청록색으로 발색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를 석회화 작용(Calcification)이라고 하는데, 물속에 용해된 탄산칼슘이 바위 표면에 층층이 쌓여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흐린 날씨에 방문했음에도 그 푸른빛이 선명하게 영롱했는데, 맑은 날이었다면 어땠을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폭포군이 굉장히 긴 구간에 걸쳐 이어지며, 군데군데 물에 잠겨 수영을 즐기는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섞여 있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습니다.
미솔하는 마야 언어인 촐어(Ch'ol)로 '폭포'를 뜻합니다. 촐어란 지금도 치아파스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마야계 언어입니다. 미솔하의 가장 큰 매력은 폭포 뒤쪽으로 이어지는 동굴 통로에 있습니다. 폭포 커튼 안쪽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경험인데, 물보라와 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시야 가득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아구아 아술처럼 색이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정글의 습기와 소리가 훨씬 더 원초적인 방식으로 몸에 와 닿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폭포 뒤에 서면 세상과 잠깐 단절되는 느낌이 드는데, 그 감각은 사진으로는 절대 전달이 안 됩니다.
멕시코 국립관광청 자료(출처: Visit Mexico)에서도 치아파스를 멕시코에서 생태 관광 자원이 가장 풍부한 주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그 평가는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치아파스는 화려한 볼거리보다 한 발 깊이 들어갔을 때 더 많은 것을 꺼내주는 지역이었습니다. 산 크리스토발의 골목을 천천히 걷고, 팔렌케의 돌 앞에서 한참 멈추고, 아구아 아술의 물에 손을 담가봐야 비로소 이 지역의 결이 느껴집니다. 멕시코 남부를 여행하신다면 치아파스만큼은 이동 일정에 충분한 여유를 두시길 권합니다. 빠르게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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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packing-up-the-pieces.com/chiapas-road-trip-mexico/
https://whc.unesco.org/en/list/411
https://www.visitmexico.com/chiap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