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본 적 있으신가요? 지도 앱을 열었는데 오히려 더 헷갈렸던 경험 말입니다. 저는 쿠바 카마궤이에서 그 감각을 제대로 맛봤습니다. 스페인이 쿠바에 세운 최초 7개 도시 중 하나인 이곳은, 처음부터 여행자를 친절하게 맞아주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미로 골목, 왜 이렇게 생겼을까요
카마궤이 골목을 처음 걸으면 누구나 비슷한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 도시의 길은 이렇게 구불구불한 걸까요? 정답은 역사 속에 있습니다.
원래 이 도시는 해안가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영국 출신 해적 헨리 모건의 공격으로 도시 전체가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모건이 바로 럼주 브랜드 '캡틴 모건'의 이름이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 주민들이 내륙으로 옮겨 도시를 다시 지었는데, 이때 의도적으로 외부 침입자가 길을 잃도록 불규칙한 도시 구조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반대로 성당 가까이 살려는 주민들이 제각각 집을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로처럼 됐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카마궤이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니, 어느 쪽이 맞는지는 사실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봤는데, 어느 쪽이 맞든 결과는 동일합니다. 지도 앱은 자꾸 틀린 방향을 알려주고, 간판은 눈에 잘 띄지 않으며, 유명 관광지처럼 어디를 봐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표지판도 많지 않습니다. 처음 이틀은 솔직히 이게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카마궤이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공식 지정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라틴아메리카 식민 도시 중 이렇게 불규칙한 도시 계획(urban morphology)을 가진 곳은 극히 드뭅니다. 도시 계획 측면에서 도시 형태학이란, 도시의 물리적 구조와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해왔는지를 분석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카마궤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있는 교과서인 셈입니다(출처: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카마궤이 골목을 걸을 때 눈여겨볼 건축적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케이드 없이 지어진 2층짜리 식민지 시대 가옥
- 나무 격자창(rejas)이 달린 큰 창문. 여기서 레하스(rejas)란 스페인 식민지 건축의 전형적인 장식 목재 창살 구조를 말합니다
- 각 건물 내부에 자리한 안뜰(patio). 안뜰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스페인 식민지 건축의 핵심 요소입니다
- 식민지 시대 가옥의 붉은 지붕 위로 솟은 종탑들
하루 이틀 걷다 보면, 그 불편함조차 이 도시의 일부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오후의 뜨거운 햇빛 아래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던 트럼펫 소리, 골목 끝에서 불쑥 마주치는 작은 광장. 이런 장면들은 친절한 안내판이 있었더라면 오히려 만날 수 없었을 것들입니다.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 광장과 티나호네스, 도시의 심장을 만나다
어느 도시를 가든 중앙 광장부터 찾게 되는데, 카마궤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 광장(Parque Ignacio Agramonte)이 바로 그 심장부입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쿠바 독립운동의 영웅 이그나시오 아그라몬테의 청동 기마상이 서 있습니다. 제가 낮에 방문했을 때는 야자수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체스를 두는 노인들, 수다를 떠는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광장의 진짜 얼굴은 밤에 드러납니다. 카마궤이는 전국적으로도 인터넷 사정이 열악한 편인데, 이 광장은 쿠바에서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몇 안 되는 공공 핫스팟 구역 중 하나입니다. 밤이 되면 스마트폰을 들고 나와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는 쿠바인들로 광장이 가득 찹니다. 처음 그 풍경을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조명이 켜진 광장 분위기는 낭만적인데,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묘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광장 주변 명소는 대부분 걸어서 이동 가능한 거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티나호네스(tinajones)입니다. 티나호네스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인 17,18세기에 만들어진 대형 도자기 항아리를 말합니다. 높이 1 ~ 2미터, 최대 용량 2,000리터에 달하는 이 항아리는 납작한 배 모양에 입구가 좁은 형태가 특징입니다. 당시 물이 귀했던 환경에서 빗물을 모아 생활용수로 활용했던 실용적인 구조물이었습니다.
여기서 티나호네스의 제작 방식과 관련해, 이 도자기들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건너온 도예 기술인 테라코타(terracotta) 공법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테라코타란 고온에서 구운 점토 소재로, 내구성이 강하고 수분 유지에 뛰어난 소재를 말합니다. 지금은 실용 목적보다 카마궤이의 상징으로 도시 곳곳에 장식처럼 놓여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일종의 야외 민속 박물관(open-air museum)처럼 기능하는 셈입니다. 야외 민속 박물관이란 실제 역사 유물과 생활 공간을 원래 자리에 보존하여 방문객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전시 방식입니다.
티나호네스 옆을 지나가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노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순간이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카마궤이가 철도를 받아들인 것은 1903년, 카레테라 센트랄(Carretera Central) 고속도로가 연결된 것은 1931년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주요 교통망에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가 역사적 원형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습니다(출처: Cuba Tourist Board).
그리고 이 도시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집니다. 티나호네스의 물을 마신 여행자는 카마궤이를 떠나지 못하고 결국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물을 마시지 않았지만, 이상할 만큼 오래 이 도시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카마궤이는 화려한 리조트나 거대한 관광 명소 대신 평범한 골목과 사람들의 일상이 여행의 중심이 되는 도시입니다. 밤 골목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던 트럼펫 소리와 웃음소리, 광장에서 천천히 마셨던 모히토 한 잔. 특별한 사건이 없었는데도 이 도시의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오래갑니다. 쿠바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아바나나 트리니다드와 함께 카마궤이를 일정에 넣어보시길 권합니다. 단, 지도 앱은 너무 믿지 마시고, 그냥 걷다 보면 됩니다.
참고: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 Historic Centre of Camagüey